[Jazz] 신관웅 from NewsPeople(http://www.inewspeople.co.kr/)














Art & People – 재즈와 궁합이 맞는 재즈피아니스트
“재즈 말고 다른 건 할 줄도 몰라”


장인혜 기자 inhye@inewspeople.co.kr



늘 검은 색안경을 끼고 있고, 꽁지머리를 한 채 피아노를 연주하는 그는 올해 예순
하나다. 그의 손가락은 88개 피아노 건반위에서 때로는 분주하게, 때로는 가볍게 움직인다. 한 달에 한 번 무료로 공연되는‘재즈파크’에서, 그가 운영하는 재즈클럽‘문글로우’에서 다소 저렴하고 손쉽게 그의 재즈 피아노 선율을 들을 수 있음이 미안할 만큼 그는 우리나라 재즈역사에 길이 남을 거장이다. 그는 재즈피아니스트 신관웅이다.

#. All that Jazz






   
머릿속에 1,000개 정도의 재즈 피아노 악보를 가지고 있어 곡명만 대면 즉흥 연주가 가능하다는 재즈피아니스트 신관웅. 풍금으로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해서 피아노 뚜껑을 몰래 따서 연주를 했다는 도둑피아노를 거쳐 미8군에서 재즈를 만나고 재즈 말고는 인생에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삶을 살게 되기까지 그는 우리나라 재즈 역사의 산 증인이다. 재즈라는 음악적 장르가 우리나라에 처음 입성하게 된 계기는 전쟁 이후다. 미군이 주둔했던 것이 재즈가 국내에 상륙하게 된 직접적 원인이라고 봤을 때 전쟁 후 미8군의 존재는 우리나라 재즈 1세대를 탄생시킨 보금자리 역할을 했다. 지금은 70대 노인이 다 된 1세대 재즈뮤지션들은 당시 미8군에서 들려지고 있던 재즈에 매력을 느껴 하나 둘 각자의 포지션에서 재즈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악보 한 장이 없던 시절이라 어렵사리 구한 음반을 수백번 들어가며 악보를 따기도 했고, 잘 잡히지도 않는 AFKN라디오 주파수를 맞추고 재즈를 듣기도 하며 이들은 우리나라 재즈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 후 5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에게 재즈는 역시 남의 나라 음악이라는 것과 그 무궁무진한 매력을 동시에 인식시킨 장르가 되었다.

Q. 피아노를 향한 열정은 왜 생겨나게 되었나.
– 본래 아버지가 원래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으셨다. 가끔 풍금도 연주하셨었고, 만다린도 연주해주셨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어린 마음에 쓸쓸하고 외로운 마음을 기댈 곳이 필요했던 것 같다. 뭔가 위안이 될 만한, 빠져들 만한 것이 필요한 시기였는데 그것이 피아노였다. 나는 음악 관련 공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모든 것을 혼자 결정했고, 피아노 연주도 혼자 터득했다.

Q. 당시에 굳이 재즈를 선택한 것은 운명이었나.
– 나의 음악에 대해서, 나의 피아노에 대해서 함께 고민할 사람이 주위에 별로 없었다. 스스로 연습했고, 스스로 결정했던 것이다. 우연히 미8군에서 밴드 연주를 하게 된 이후 재즈를 접하게 됐다. 미8군은 재즈 연주자들에게는 큰 기회였다. 처음 재즈를 접한 곳도 그곳이고 연주를 시작한 곳도 미8군이다. 재즈연주가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보여지지만 사실 나는 클래식 피아노를 하고 싶었다. 당시 여건이나 상황이 그걸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재즈가 선택되어진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지금 이렇게 되지 않았나.






  
Q. 70년대 재즈와 2000년대 재즈는 많이 다른가.
– 음악이 다르다기 보다는 환경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음반 하나를 구하기 위해 청계천 바닥을 휘젓고 다녔고, 곡을 일일이 다 받아적어가면서 악보를 만들었다. 어려운 시대에 태어난 것이 억울하기도 하다. 지금은 음반의 홍수 시대고, 인터넷을 통해 독학도 가능하다. 당시 재즈는 하는 사람도 드물었고, 듣는 사람은 없었다고 봐야 한다. 물론 스승도 없었다. 그런 시대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 Old and New

피아노 신관웅, 드럼 최세진, 트롬본 홍덕표, 트럼펜 강대관, 클라리넷 이동기, 섹소폰 김수열, 타악기 류복성씨는 평균연령 65세 이상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대한민국 재즈 1세대로 불린다. 얼마 전 트롬본 홍덕표씨는 무대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 추모 공연을 열었었고, 최근 고희 기념공연을 한 클라리넷 이동기씨, 77세의 최고령 드러머 최세진씨는 지난 4월 생애 첫 앨범을 발표하기도 하는 등 노장들의 재즈에 대한 열정이 멈출 줄 모른다. 저마다의 이유로 악기를 놓고 각자의 삶을 살고 있던 이들을 한데 모아 1세대 밴드를 탄생시킨 주인공은 이 밴드의 가장 막내인 신관웅씨다.

Q. 재즈 1세대가 이렇게까지 잘될 줄 알았나.
– 사실 지금의 재즈파크가 탄생하기 이전에 LG패션 신홍순 전 사장과의 인연으로 압구정동에서 자그마하게 재즈 연주회를 시작하게 됐다. 이때 반응이 괜찮았는지 몇 년 후에 섬유빌딩에서 한달에 한 번 재즈파크 공연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재즈 1세대 타이틀을 걸고 선생님들을 모셔와 밴드를 결성하고 재즈파크 공연을 시작했다. 이때가 2001년이다. 당시 뿔뿔이 흩어져 있던 선생님들을 다 모셔놓고 보니 이전에 내가 한번 이상씩 함께 공연을 했던 인연도 있고 해서 호흡을 맞추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사실 젊은 친구들도 많은데 나이든 사람들이 마음껏 연주할 만한 공간과 기회가 당시에는 전혀 없었다. 어딜가나 찬밥 신세를 당하기 일쑤다. 또 혼자 연주하고 다니는 것보다 밴드를 결성하면 훨씬 힘이 있어지기 때문에 한국 재즈 1세대라는 타이틀은 굉장했다.

Q. 한달에 한번 무료로 수준높은 재즈 공연을 즐길 수 있는 재즈파크 공연이 제법 유명해졌다.
– 본래 재즈파크 공연이 1세대 선생님들이 꾸려나가는 것으로 2년여를 진행했었다. 하지만 공연이 계속되다 보니 레파토리도 겹치게 되고, 다들 연세도 있으시고 해서 공연문화의 다양성을 위해 재즈를 기본으로 하되 다양한 장르 결합을 하고, 여러 뮤지션들을 만날 수 있는 재즈파크 공연으로 변모한 것이다. 최근에 5주년 기념공연을 하기도 했는데, 재즈의 대중화에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 Try something special

신관웅의 재즈 피아노 연주는 대금이나 아쟁과 어우러지기도 하고, 클래식을 새롭게 편곡하여 스윙을 집어넣는가 하면, 피아노 현을 튕기는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한다. 때로는 피아노를 통해 타악기를 표현해보고 싶다며 엉덩이로 연주의 대미를 장식하기도 한다. 또한 국내 최초로 16명이 참여하는 재즈‘빅 밴드’를 결성해 국내외 공연에서 우리의 재즈 수준을 한껏 높이기도 했다. 연주에 대한, 음악에 대한, 음악을 들려줄 방법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새로운 시도가 우리나라 재즈 역사를 주도하고 있다. 이날 문글로우(Moon Glow)에서는 대금으로 연주되는’Take That’이 새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어느 새 관객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Q. 재즈와 국악의 크로스오버는 어떻게 탄생하게 됐나.
– 재즈는 본래 흑인 음악이다. 우리가 아무리 연주를 해도 동양인은 흑인 재즈에 못 미치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흑인이 우리의 국악을 아무리 잘 해도 분명 우리가 하는 것에 못 미치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좌절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에서 클래식과 재즈의 크로스오버를 통해 하나의 장르로써 세계에서 인정받는 만큼 나도 우리의 국악을 재즈에 접목시켜 새로운 형식의, 새로운 느낌의 음악을 대중에게 선사하고 싶었다. 재즈는 왜 섹스폰, 트럼본 등 서양악기로만 해야 하는가에서 출발한 시도가 국악의 리듬을 피아노로, 드럼으로 표현해보고, 재즈의 선율을 대금으로, 아쟁으로 실현해 보는 등 여러 형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안토니오카를로스조빔은 카사노바 리듬을 세계에 알림으로써 브라질을 알린 셈이다. 그런 것처럼 나도 재즈와 국악의 크로스오버를 통해 보다 친근하게 국악을 널리 알리고 싶은 거다.






  
Q. 빅밴드 결성과 운영은 쉬운 게 아닐 것 같다.
– 처음 빅밴드를 결성하겠다고 마음먹었던 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10년 넘게 계속 진행되어가고 있는 것을 보면 리더인 내가 잘 해서 되는 것도, 그들이 잘 따라주어서 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냥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함께 연주하고, 얼굴 보고, 대화하고 하는 것들이 습관이 되어버린 거다. 습관이 무섭다는 건 사실인 것 같다. 다들 다른 루트를 통해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차비 정도만으로도 빅밴드가 굴러갈 수 있는 것 같다. 지금은 정말 많이 좋아진 거다. 재즈라는 음악은 서로 마음이 맞고 소통이 되지 않으면 절대 함께 연주를 할 수 없는 음악이다. 솔로부분도 많고, 애드립도 많지만 그런 부분들이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다 호흡이고 조화다. 그래서 빅밴드는 결성부터 함께하기까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Q. 우리나라에는 음악계에 빅밴드 개념이 없지 않나.

– 일본에 재즈 빅밴드 페스티벌을 간 적이 있는데 당시 빅밴드 팀만 10팀이었다. 단 한명도 겹치는 사람이 없었다. 비단 재즈 분야 뿐만이 아니다. 누군가 총대를 메고, 리드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이런 실험적인, 도전적인 연주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고, 개인주의가 만연한 탓도 있겠지만 연주하는 빅밴드 문화가 정착되면 음악의 질적 향상은 당연히 따라오게 되어 있다. 젊은 뮤지션들에게 이런 개척정신을 강조하고 싶다. 자기를 조금 희생하더라도 도전해보고, 실패도 해보고, 희열감도 느껴보는 기회를 자꾸 만들어 가야 한다.

혼이 빠질 듯이 솔로 연주를 하고 난 후 터져나오는 관객들의 박수갈채가 재즈를 계속 하게 만드는 자극제이자 원동력이 된다고 말하는 재즈피아니스트 신관웅은 피아노를 쳐달라고 하면 지구 끝까지라도 가서 연주를 하겠다는 정신으로 무장돼 있다. 연주자가 연주를 하지 않고 후진 양성에만 몰두하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그는“요즘은 재즈를 한다 하면 모두 외국에 나가서 공부해오고 배워오고 해서 가르칠만한 명분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재즈에서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니라 좋은 인격이다. 클래식은 악보대로 자기 부분에 충실하면 되지만 재즈는 서로의 악기를 통해 대화를 하는 것이다. 대화가 원활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인간적인 소통을 해야 하기 때문에 좋은 인격체를 가진 연주자는 좋은 연주를 해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홍대 부근의 재즈클럽 문글로우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재즈파크에서, 매주 일요일 대학로 천년동안도에서 재즈피아니스트 신관웅과 그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 “홍보가 뭐 별건가, 이렇게 나를 찾아와주고 알아봐주시는 게 제일 큰 홍보지.”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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